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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뉴스

제주불교협회 친일 ‘규정?’...참여 인사 행적 통해 기존 주장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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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0-22 12:18 조회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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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창립된 제주불교협회 구성원이 일부 친일 흔적이 있지만 제주불교협회 친일단체로 규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이 ‘근대 제주불교문화역사 그 진실을 찾다’ 세 번째 학술세미나가 오늘(21일) 제주시 테크노파크에서 열렸습니다.

이성수 문학박사는 제주불교협회 주요 참여 인사의 행적을 통해 기존 주장을 조목 조목 반박했습니다.

1924년 창립된 제주불교연합회는 불교진흥과 신심수양, 지방문화발전이란 목적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불교발전과 지역근대화에 이바지합니다.

이성수 박사는 제주불교협회 부회장이며 제주인 제1호 의사였던 고태민은 1927년 일제의 감시를 받던 항일독립운동가 고수선과 결혼 사실을 보더라도 고태민은 민속의식이 탁월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제주불교협회 포교당 기금에 동참했던 제주 1호 변호사 최원순의 자녀를 보면 독립운동가이자 제주도교육감을 지낸 최정숙입니다.

또한 제주불교협회 총무이자 변호사로 당시 활동했던 양홍기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포함됐지만 2009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일부는 민족운동 관련 변호 활동을 한 사례도 있는 만큼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이 박사는 “‘일부’를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관이 참여를 두고 친일로 해석하지만 제주인이 주도하고 강점기라는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친일’로 단정 짓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탐라문화유산보존회 이사장 상민스님은 기존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한 관음사를 다른 스님과 창건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상민 스님은 매일신보가 1918년 3월 2일부터 3일자 2회에 걸쳐 보도한 ‘여승이 작은 한 사람의 힘으로 창조한 절인바’를 기사를 들며 “관음사를 그것도 여승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창조했다”고 말하며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다른 스님과 함께 관음사를 창건했다는 말하고 있으나 이는 창건 이후에 사찰 규모를 확장하거나 중창하는 과정일지는 모르나 기사 내용과 같이 사찰 규모와 관계없이 봉려관 스님이 홀로 관음사를 창건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법정악에 창건한 사찰 명을 ‘법돌사’라를 보면 법돌(法凭)은 한자음의 ‘빙(凭)’으로 그 뜻은 ‘기대다, 의지하다’로, 법빙은 ‘부처님 법에 의지 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귀의한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이 사찰의 명칭의 미미를 보면 법돌사(法돌사)라 한 것은 스님이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과 스님의 부처님 법으로 혼탁한 사회를 올곧게 세우겠다는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혜달스님은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을 규명했습니다.

스님은 “재판부가 판단한 법정사 항일거사의 구성원은 불교신도와 농민”이라며 “당시 법정사를 출발할 때 34명 중 상당수가 불교도일 개연성이 높고, 상동에서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까지 각 마을에서 모집한 인원 약 400명 중 다수는 농민으로 판단했다”면서 “이 같은 판결문에 근거하며 몇 명을 제외한 그 밖에 대다수 가담자를 특정 종교인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재판부와 송치자 진술 모두 불교신도와 농민을 제외한 여타 종교가 없다는 것으로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은 법정사 주지 김연일의 총지휘 하에 기획되고 준비를 마친 후 음력 9월 3일 새벽에 법정사를 출발해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까지 20km 이어진 400명 전후의 제주도민 항일운동이었다”고 법정사 항일운동을 정의하며 “불교계의 전유물도 보천교의 전유물도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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